꽃과 쓰레기 (3)


꽃과 쓰레기 (3)

[틱낫한 지음 | 한창호•주영아 옮김 | 이솔 출판]



승가와 더불어 수행하면
수행의 열매가 쉽게 얻어진다.
승가에 귀의할 때 변환이 실현될 수 있다.



[승가]

변환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난다.
변환 작업을 수월하게 하려면
승가와 함께 수행하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기쁨과 희망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은 기쁨과 평화,
자유와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저 멈춰서 그것과 접하기만 하면 된다.

멈추는 수행은 집중을 가져온다.
집중은 알아차림을 더욱 확고하게 해 준다.
집중이 있으면 깊이 통찰하기가 훨씬 쉽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 속에서
집중과 깊이 통찰하기를 수행할 수 있다.
멈추기는 우리가 삶을 진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승가는 배우고 수행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승가는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가르침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이다.

변환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일어난다.
승가에 귀의하고 승가와 더불어 수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승가를 만드는 데 주저하지 말라.
바로 지금 조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에 자신의 승가를 만들어야 한다.
승가와 더불어 수행하면 수행의 열매가 쉽게 얻어진다.
승가에 귀의할 때 변환이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승가를 환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좋은 환경은 변환과 치유 작업에 매우 중요하다.
좋은 씨앗이나 좋은 유전자가 뿌려졌다고 해도
좋은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좋은 씨앗이나 유전자가 오랫동안 전면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승가를 만들고 건강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현대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삼해탈문은 모든 불교 학파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다.

첫 번째 문은 공해탈문이다.
두 번째 문은 무상해탈문이다.
세 번째 문은 무원해탈문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되고자 하는 존재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완전하고 확실하게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뒤쫓을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는 이미 온 우주가 들어 있다.
그저 알아차림을 통해 자신으로 돌아가
우리 내면과 주위에 이미 존재하는 평화와 기쁨을 만나면 된다.

나는 이미 도착했다. 나는 이미 집에 와 있다.

우리의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다.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의 파도를 평화롭게 탈 수 있다.

두려움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연민의 배를 타고
망상의 바다 위를 여행할 수 있다.

우리는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관점에서
쓰레기 속에서 꽃을 보고 꽃 속에서 쓰레기를 본다.

깨달음과 행복을 응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괴로움이라는 토대, 번뇌라는 토대 위에서이다.

보살은 
태어남 없음과 죽음 없음의 
본질 속으로 뚫고 들어간 사람이다.
그렇기때문에 보살에게는 밤이고 낮이고 두려움이 없다.

보살은 그런 자유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괴로움과 번뇌의 세계에 있음으로써 부처가 될 수 있다.






꽃과 쓰레기 (2)


꽃과 쓰레기 (2)

[틱낫한 지음 | 한창호•주영아 옮김 | 이솔 출판]



윤회를 열반으로 변환시키려면
윤회와 열반이 모두 우리 의식이 드러난 것임을
깊이 통찰하고 명확히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두려움 없음]

번뇌가 바로 깨달음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두려움 없는 미소를 지은 채
망상의 바다 위에서 연민의 배를 타고
평화롭게 태어남과 죽음의 파도를 탈 수 있다.


보살은 우리들과 똑같이 태어남과 죽음,
영속성, 자아의 세계에 머문다. 하지만
보살은 무상과 무아를 깊이 통찰하는 수행 덕분에
존재와 비존재, 하나와 여럿, 오고 감, 태어남과 죽음 같은
관념과 연관된 두려움에서 벗어나 궁극적 차원과 접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 속에서 보살은 평화롭게 태어남과 죽음의 파도를 탄다.

수행을 해서 실체의 궁극적 차원과 접한다면
우리도 보살의 두려움 없는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우리도 보살들과 마찬가지로 번뇌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다른 어딘가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번뇌와 깨달음이 하나임을 안다.
마음이 망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번뇌만을 본다.
그러나 마음이 참되면 번뇌는 더 이상 우리 마음속에 없다.
오직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상호 의존하는 존재의 본성을 접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태어남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체의 궁극적 차원과 접하는 법을 안다면,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실체를 안다면,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다.
                            
두려움 없음은 불교에서 가장 위대한 수행이다.

정원사는 꽃을 쫓아다니지도 않으며
쓰레기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정원사는 꽃과 쓰레기를 둘 다 받아들이고 둘 다 잘 돌본다.
정원사는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도 않고
어느 한쪽을 배척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둘의 본성이 상호 의존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정원사는 꽃과 쓰레기 둘 다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다.
보살은 능숙한 정원사가 꽃과 쓰레기를 다루는 것처럼
아무 분별없이 깨달음과 번뇌를 다룬다.
정원사는 변화시키는 법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부처의 마음가짐이다.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다.
붙잡을 것도 없고 놓을 것도 없다.
윤회가 곧 열반이다.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속적 차원은 궁극적 차원과 분리되지 않는다.
파도는 물이 되는 상태를 얻을 필요가 없다.
파도가 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속적 차원, 즉 존재와 비존재,
연속과 중단, 오고 감의 세계에 살지만
그와 동시에 열반과도 접하고 있다.

열반은 우리의 본성이다.
파도가 언제나 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항상 열반 속에 있었다.

무상과 무아에 관한 관념을 포함해
모든 관념이 소멸되는 것이 열반이다.

우리가 무상과 접하면 열반과도 접한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한다.

태어남과 죽음도 없으며 오직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열반이 아닌 적이 없었다.

안과 밖이라는 관념을 초월하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대상이 이미 우리 내면에 있음을 알게 된다.
얻고자 하는 것을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얻을 수 있다.
얻을 것이 없음에 대한 명상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대상은 이미 얻어졌다.
우리는 어떤 것도 얻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다.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개념을 단지 폭넓은 이해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궁극적 차원에 도달하면 개념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상호 의존적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면
실재의 참다운 본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궁극적 실재로 가는 문을 열어 주는 열쇠는
상호 의존의 시각으로 깊이 통찰하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

의식에는 언제나
주체와 객체가 있다.
나와 남, 안과 밖은 모두
개념적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주체와 객체는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동시에 함께 작용한다.
대상 없이는 의식이 존재할 수 없다.
의식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주체 없이 객체가 없고 객체 없이 주체가 없다.
주체와 객체 둘 다 상호 의존해 존재하며 둘 다 전체에 토대를 이룬다.

우리 눈이 형상 및 색깔과 접촉할 때 한 순간의 안식이 발생한다.
보는 작용과 안식은 아뢰야식 속 씨앗들에서 생겨난다.

보기, 듣기, 생각하기, 인식하기, 이해하기,
상상하기가 모두 의식이며 의식은 늘 주체와 객체를 모두 포함한다.

'오직 드러남뿐'의 가르침에서 '의식'은
인지하고 인식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의식에는 여러 다른 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의식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의식의 여러 기능이 존재하는 만큼이나 많은 의식이 존재한다.



[온갖 종류의 씨앗]

우리 내면에는 무한히 다양한 씨앗이 존재한다.
윤회, 열반, 망상, 깨달음의 씨앗,
괴로움과 행복의 씨앗,
인식, 이름, 말의 씨앗 등이 존재한다.

열반은 안정과 자유를 뜻하며
괴로움의 순환이 중단되는 것을 뜻한다.
깨달음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아무리 부처님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는 없다.
깨달음의 씨앗은 우리 의식 내부에 이미 있다.
그것이 우리의 불성이다.
불성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깨달은 마음이라는 내재적 특성으로,
우리는 단지 그것을 보살펴 줄 필요가 있을 뿐이다.

윤회를 열반으로 변화시키려면
윤회와 열반이 모두 우리 의식이 드러난 것임을
깊이 통찰하고 명확히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몸, 우리의 마음, 그리고 세계는
모두 우리 의식 안에 저장된 씨앗이 눈앞의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모든 현상은 우리 의식의 드러남이다.
                            
의식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함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온갖 경험과 인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훈습된다.
우리의 경험과 지각은 아뢰야식에 씨앗으로 저장된다.



[개별적인 씨앗과 집단적인 씨앗]

우리의 모든 씨앗은
가족, 친구, 사회, 혹은 교육
그 어떤 것을 통해 전해졌더라도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다.


아뢰야식은 개별적 의식과 집단적 의식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의 아뢰야식에 있는 각각의 씨앗은 개별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다.

우리는 개별적이라든가 집단적이라는 관념을 초월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그 안에 두 가지 요소를 다 갖고 있으며
집단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서로 의존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것은 언제나 집단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며
집단적인 것도 언제나 개별적인 것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아뢰야식에 들어 있는 모든 씨앗은
개별적 성격과 집단적 성격을 둘 다 지녔다.

우리 의식 속 씨앗에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에 걸친
많은 이들의 경험과 생각과 인식이 들어 있다.
우리 의식에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 걸친 집단적 의식이 스며들어 있다.





꽃과 쓰레기 (1)


꽃과 쓰레기 (1)

[틱낫한 지음 | 한창호•주영아 옮김 | 이솔 출판]



참된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연기는 놀라운 화엄의 세계를 가져온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볍고 기쁘고 즐겁다.



[크고 원만한 거울 같은 지혜]

어리석음이 극복되면 이해가 드러나고
아뢰야식은 더이상 번뇌에 지배되지 않는다.
아뢰야식은 크고 원만한 거울 같은 지혜가 되어
모든 방향에서 우주를 그대로 비춘다.
그런 아뢰야식의 이름은 청정식이다.

상호 의존해 존재하는 본성을
깊이 통찰하는 수행을 통해 어리석음 혹은

무지가 프라즈냐, 즉 이해나 지혜로 변환될 수 있다.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무지는 줄어들고 이해는 늘어간다.
어느 순간 무지가 완전히 변환되어
이해가 현실이 되는 지점이 있다.
프라즈냐, 즉 지혜는 때로 청정한 의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뢰야식은 완전히 정화되면 더이상
두려움, 분노, 증오, 분별심 같은 번뇌에 압도되지 않는다.
변환이 되면 아뢰야식은 자유롭다.
아뢰야식은 크고 원만한 거울 같은 지혜로 변환되어
아무런 왜곡 없이 여여한 세상을 비출 수 있다.

아뢰야식 속에 명상의 대상을 하나의 씨앗처럼 심어 놓고
거기에 매일 물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걷거나 서거나 눕거나 앉는 일상생활을 할 때
알아차림 수행을 통해 그 씨앗에 물을 준다.
매일같이 그 씨앗에 물을 주면
어느 날 우리가 전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아뢰야식이 주는 선물로서 이해의 꽃이 나타날 것이다.

제6 의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하도록 명령을 받으면
아뢰야식은 밤이고 낮이고 일한다.

우리는 아뢰야식을 신뢰해야 한다.
아뢰야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면 수행에 성공할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

태어남과 죽음은 모두 조건에 의존한다.
의식은 그 본성상 분별적인 드러남이다.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은 주체와 객체로서
서로에게 의존한다.

태어남과 죽음의 원인과 조건을
깊이 통찰해서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이 단지
관념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태어남과 죽음은 매 순간 동시에 일어난다.

의식이 드러날 때 차이와 분별이 일어난다.
분별은 가상으로 만든 것이고
마음이 꾸며 낸 것이다.

의식의 본성은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의식의 드러남이다.
개별적이기도 하고
집단적이기도 한
인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객관적 실체라고 믿는 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다.



다시 태어남의 순환은
몸과 말과 생각의 행로에 달려있다.
우리는 매 순간 가벼움과 해탈,
평화와 기쁨의 에너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래야 태어남과 죽음의 순환인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과 모두에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



사물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사물 그 자체의 영역과 접할 수 있을 때,
우리 마음은 참된 마음이 된다.

참된 마음은 환히 빛나고 지혜롭다.
참된 마음 속에는 이해와 연민이 있다.

참된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연기는 놀라운 화엄의 세계를 가져온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볍고 기쁘고 즐겁다.

연기는 이해심과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을 한곳에 모을 수 있고,
그러면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이 누릴
작은 낙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햇빛과 기쁨과 평화로 가득찬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모이는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을 상상해 보라.

이해심이 많고 사랑이 넘치며
그릇된 인식에 지배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마음속에 그려 보라.

이는 화엄의 멋진 세계이며,
망상에 빠진 마음이 아니라
지혜가 상호 의존해서 드러난 것이다.



원만히 성취된 본성은
사물을 상호 의존하는 존재라는
본질 속에서 인식한다는 뜻이고,
여럿 속에서 하나를 보고
하나 속에서 여럿을 보는 식으로 산다는 뜻이며,
태어남도 죽음도 없고 오고 감도 없음을 안다는 의미이다.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는 법을 익히면
우리 앞에 놀라운 여여함의 세계가 드러날 것이고
해탈로 향하는 문이 열릴 것이다.

실체가 지닌
원만히 성취된 본성과 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지혜의 문을 열고
온갖 망상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여여함의 세계 속에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아, 영원, 이원성과 같은
관념에 기반을 두고 사물을 바라보면
우리는 마음속 망상의 씨앗에 계속 물을 주게 되고
윤회의 순환 속에서 계속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의타기성, 즉 상호 의존적 본성이다.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실재의 상호 의존적 본성을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다.



[수행의 길]

상호 의존하는 본성에 관해 명상하면
망상을 깨달음으로 변환할 수 있다.
윤회와 여여함은 둘이 아니다.
그 둘은 하나이다.

원만하게 성취된 자기 본성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개념화에 지배받지도 않는다.

사물 그 자체의 영역에는
태어남과 죽음, 하나와 여럿,
오고 감, 존재와 비존재가 없다.

사물 그 자체의 영역은 궁극적 차원이며
여여함의 영역, 열반의 영역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가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 수 있을까?

그 길은 상호 의존적 본성에 대해 
명상을 하는 것, 즉 의타기성을 수행하는 것이다.

윤회와 여여함은 똑같은 기반,
즉 우리의 마음, 우리 의식이라는 기반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의
상호 의존적 자기 본성을 깊이 통찰하고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무지를 깨달음을 통한 이해로 바꾸는 길이다.

우리는 무상과 무아와 연기를 깊이 통찰함으로써
사물의 존재 방식을 명확히 이해한다.

열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은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해서 존재하는 본성 혹은 연기로 설명하는 것이다.

상호 의존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만물을 볼 수 있을 때
내면에 있는 열반의 본성과 만나게 된다.



[꽃과 쓰레기]

꽃은 피고 있는 동안에도 이미 퇴비 속에 있고
퇴비는 이미 꽃 속에 있다.
꽃과 퇴비는 둘이 아니다.
번뇌와 깨달음도 상호 의존해서 존재한다.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차분하고 맑다면
우리는 이미 정토에 있는 셈이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상호 의존적이다.
열반은 오로지 태어남과 죽음의 세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모든 번뇌와 마음현상,
그리고 이 세상과 우리 몸과 
우리 마음속의 온갖 어려운 것들을 
변환시키려면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혐오하는 것들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괴로움과 망상을 포함해
지금 여기 있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괴로움과 망상을 받아들이면
이미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수행의 시작이다.

깨달음은 번뇌로부터 도망감으로써 얻을 수 없다.
번뇌의 본성을 심오하게 통찰할 때 깨달음과 접할 수 있다.

우리 아뢰야식 속에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알아차림이라는 놀라운 씨앗이 있다.
매 순간 알아차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탁자에, 의자에, 집에, 산에, 구름에,
우리 몸 각각의 세포 안에 열반이 있음을 안다.

알아차림 속에서 생활하면
깊이 통찰하는 집중 속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알아차림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수행할 때 꼭 필요하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을 알아차림의 상태로 살아야 한다.

알아차리면서 보고 듣고 접촉해야 한다.
요리를 할 때도 자신의 동작을 알아차리면서 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호흡을 즐기면
삶을 깊이 접하게 해 주는
알아차림의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바른 견해]

깨달음의 씨앗에 물을 주기 위해
의식적인 호흡을 수행하라.
바른 견해는
제6 의식이라는 꽃밭에 피어나는 꽃이다.

명심할 것은 아뢰야식 속 씨앗에 물을 주는 정원사가
바로 제6 의식이라는 점이다.

정원사는 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물을 주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뢰야식이라는 땅속에 깨달음의 씨앗을 심고
거기에 알아차림으로 물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깨달음의 씨앗이
제6 의식 속에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참된 삶이 가능하며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알아차리며 걷고, 알아차리며 호흡하고,
알아차리며 앉는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알아차림 수행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행위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가 하는 행위의 결과를 피할 수 없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내가 딛고 서는 터전이 된다.



[근본적인 변환]

우리는 내면의 족쇄와 잠재된 성향을 인지함으로써
그것들을 변환시킬 수 있다.
우리의 습관 에너지가 사라질 때
근본적인 변환이 이루어진다.

알아차림에 뿌리를 박으면
우리 내면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 명확히 볼 수 있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하는 행위들은
습관 에너지의 결과일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모든 행동이
우리의 상태를 결정한다.

행복과 빛의 세상으로 가고 싶으면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
최상의 습관은 알아차림 수행이다.

습관 에너지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유물이며
죽을 때도 계속 갖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다.

알아차림 속에서 살면
세계는 그저 우리의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의식일 뿐,
나와 남, 태어남과 죽음, 오고 감, 존재와 비존재가
모두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본적인 변환은 
아뢰야식 속 깊은 곳의 변환을 의미한다.
아뢰야식이 모든 의식의 바탕이며
궁극적으로 전체 우주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습관 에너지와 접하고
아뢰야식 속의 폭력과 절망,
두려움과 분노의 뿌리를 변환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근본적인 변환이 일어난다.
내면의 족쇄와 잠재된 성향을 변환시키려면
먼저 그것들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무아와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통찰을 통해 바라보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아뢰야식 속 이해의 씨앗에 밤낮으로 물을 주어야 한다.






HOW TO EAT : 먹기 명상


먹기 명상 HOW TO EAT

[틱낫한 지음 | 진우기 옮김 | 한빛비즈 출판]



[쌀 한 톨에 우주가]

쌀 한 톨을 마음다함과 집중으로 바라볼 때
단 일 초 만에 이 곡식에 온 우주(빗물, 구름, 지구,
시간, 공간, 농부 그리고 만물)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다함과 집중이 통찰을 가져오고,
한 순간 한 톨의 쌀에서 아주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놀랍도록 빠릅니다!

마음다함과 집중이 있으면
언제든 통찰을 할 수 있습니다.

쌀알을 입 안에 넣으면
온 우주를 입 안에 넣은 것입니다.

이는 생각을 멈추면 가능합니다.
쌀알을 씹을 때 다른 생각을 한다면
이 경이로운 실재를 맛볼 수 없습니다.



[시간을 들여]

음식을 먹을 때는
충분히 시간을 할애하여 먹는 것이 좋습니다.
먹는 시간은 매우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할 때 천천히 드십시오.
충분히 즐기세요.

생각을 멈추고 먹는 일에 온전히 몸과 마음으로 현존하십시오.



[치유]

마음다함으로 먹을 때는 몸과 마음,
지구별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만을 소비합니다.

이렇게 먹기 수행을 할 때
나와 남의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나를 치유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의 치유를 도울 수 있습니다.

영성 가족으로서, 그리고 인간 가족의 일원으로서
나는 이런 먹기 수행을 하여 삶이 좀 더 지속가능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최고의 음식]

내가 무엇을 사고,
무엇을 먹는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사고 먹는 것들이
기후변화를 더 가속화하거나,
멈추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몸에 자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먹을 때도
나의 먹기가 지구를 더욱 파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유 있는 식사]

스케줄을 조정하여 식사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기 바랍니다.
장소와 음식도 적합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준다면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먹는지도 말해준다면
역시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소비하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내일 무엇을 얼마나 소비하는지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본성을 매우 잘 알게 됩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소비해야 하지만,
그런 행위를 마음다함 없이 아무렇게나 한다면
몸과 의식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한 끼의 식사는 나보다 앞서 왔던 생명들에게,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 태어날 생명들에게 감사를 표할 기회입니다.



[지구별이 '나']

내가 먹은 음식은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나옵니다.

지구별은 내 안에 있고,
한 숟가락의 음식에 있고,
내가 숨 쉬는 공기에도 있고,
내가 마셔 몸속에 흐르는 물에도 있습니다

내가 지구별의 일부임을 즐기십시오.

그리고 한술 음식으로
지구별과 나의 인연이 더 깊어짐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렇게 음식을 드십시오.



[음식에 대한 다섯 가지 숙고]

1. 이 음식은 지구별과 하늘, 뭇 생명,
    무수한 사람의 수고와 사랑,
    노동이 합쳐져 온 선물입니다.

2. 이 음식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마음다함과 감사로 먹게 하소서.

3. 저의 탐욕과 불건전한 심리작용을 인지하고
    변화시켜서 적절한 양을 먹을 수 있게 하소서.

4. 뭇 생명의 고통을 줄이고,
    기후변화를 악화하지 않고,
    소중한 지구별을 치유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음식을 먹게 하여
    저의 자비심이 늘 살아 있게 하소서.

5. 형제애를 돈독히 하고,
    공동체를 구축하며,
    뭇 생명에 봉사한다는 이상에
    자양분을 줄 수 있도록 이 음식을 받습니다.



[음식 담기]

이 음식에서
나는 분명히 보네.
나의 생명을 부양하는
온 우주의 현존을.



[나의 접시 보기]

이 접시에 담긴 음식
향기롭게 입맛을 돋우네.
또한 많은 고통도 담겨 있네.



[먹기를 시작하며]

첫 번째 한 입을 먹으며
기쁨을 가져오는 사랑을 수행하네.
두 번째 한 입을 먹으며
고통을 완화하는 사랑을 수행하네.
세 번째 한 입을 먹으며
살아 있는 기쁨을 수행하네.
네 번째 한 입을 먹으며
뭇 생명에 평등한 사랑을 수행하네.



[빈 그릇을 보며]

이제 비어 있는 나의 그릇은
곧 소중한 음식으로 채워지리.
지구 곳곳의 생명들이 힘겹게 살고 있지만
먹거리가 충분한 나는 복 있는 사람



[먹기를 마치며]

나의 그릇은 비어 있고
나의 허기는 충족되었네.
뭇 생명의 이익을 위해
살아갈 것을 맹세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