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펌]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 - 틱낫한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

[틱낫한 지음 | 이창희 옮김 | 마음터 출판]



                            잠에서 깨며


                            눈을 뜨며 나는 미소를 짓는다
                            아직 쓰지 않은 스물두 시간이 내 앞에 있다
                            매 순간을 꽉 차게 살리라,
                            모든 존재를 자비심으로 바라보리라 다짐하노라



                            하루의 첫발자국을 디디며


                            땅 위를 걷는 일은
                            기적이다!
                            조심스레 내딛는 발자국마다
                            놀라운 법신이 드러난다



                            창문을 열며


                            창문을 열며
                            법신을 내다본다
                            삶은 얼마나 놀라운지!
                            매 순간 깨어 있으니
                            마음이 조용한 강처럼 맑아진다



                       



                            수돗물을 틀며


                            높은 산의 샘에서 물이 솟아난다
                            땅 속 깊은 곳에서도 물이 흐른다
                            기적처럼 물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모든 생명을 살게 해주노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숨을 들이쉬며 몸을 고요히 하고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짓는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순간임을 깨닫는다


오늘날처럼 바쁜 세상에서 가끔
의식적으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큰 행운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숨을 쉬면 몸이 고요해지고
정신이 집중되며 기쁨과 평화, 편안함이 찾아온다.
명상을 위해 앉아 있을 때,
아니면 하루 중 아무 때라도 의식적인 호흡을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호흡하면서 이 게송을 읊으면 된다.

'숨을 들이쉬며 몸을 고요히 하고'

이 첫 행을 소리내어 읊는 것은 
마치 샘물 한 잔을 마시는 것과도 같다.
시원하고 신선한 느낌이 온몸에 퍼져가는 것이 느껴진다.
숨을 들이쉬며 이 게송을 읊으면
실제로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느낌이 든다.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읽음과 동시에 미소를 지으면
얼굴의 수많은 근육이 이완되며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된다.
그래서 부처와 보살들이 항상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여기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 앉아 있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최고의 순간임을 깨닫는다.'

편안하고 느긋하게 앉아서 우리의 호흡, 진정한 본질 등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기쁜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순간을 즐길 수 있다.
스스로 이렇게 물어보아도 된다.

'지금 당장 평화와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면 언제나 되어야
평화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내일? 아니면 모레?
무엇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못할까?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렇게 말해도 된다.

'고요해지고 미소 짓는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다.'

초심자든 경험 많은 수련자든 상관없이 모두 이 방법을 쓸 수 있다.
이 방법은 수련에서 아주 핵심적이기 때문에 
40~50년씩 수련한 사람들 가운데도 여전히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입출식념경에서 부처님은 호흡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열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셨다.
이 게송은 이 많은 방법들을 압축한 것이다.
역시 이 방법을 압축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숨을 들이쉬며 내가 들이쉬는 것을 안다
숨을 내쉬며 내가 내쉬는 것을 안다
들이쉬는 숨은 점점 깊어지고
내쉬는 숨은 점점 느려진다
숨을 들이쉬면 고요해지고
숨을 내쉬면 느긋해진다
들이쉬며 미소 짓고
내쉬며 내려놓는다
들이쉬며 지금 이 순간이
내쉬며 최고의 순간임을 깨닫는다

위의 글은 다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들이쉬고, 내쉬고.
깊게, 느리게.
고요하고, 느긋하게.
미소 짓고, 내려놓는다.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순간.

이것을 실천하기는 아주 쉽다.
앉아 있을 때나 걸으면서, 아니면
서 있거나 어떤 활동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먼저 '들이쉬고, 내쉬고'를 연습한다.
들이쉬면서 마음속으로 '들이쉰다'고 말함으로써
숨 쉬고 있다는 인식을 일깨운다.
내쉴 때는 속으로 '내쉰다'고 말함으로써
숨이 나간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들이쉰다'와 '내쉰다'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의 호흡으로 스스로를 데려오는 길잡이가 된다.
이렇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평화롭고도 분명하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과정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번 숨을 들이쉬면서 '깊이'라고 말하고
내쉬면서는 '천천히'라고 말한다.
의식적으로 호흡하면 호흡이 더 깊고 느려진다.
다른 특별한 노력은 필요 없다.
그저 나의 호흡이 더 깊고 느리며
더 평화롭고 안락하다는 사실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깊이, 느리게, 깊이, 느리게'를 반복하다 보면
그 다음 단계인 '고요하고, 느긋하게'로 넘어가고 싶어진다.

'고요'라는 단어는 경전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 왔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있으며
온몸의 활동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고 있다.
나는 숨을 내쉬고 있으며
온몸의 활동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몸'은 '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하나기 되기 때문이다.

숨을 내쉬면서 '느긋하게'라고 말한다.
느긋함이란 쫓기지 않는 느낌이며, 자유로운 느낌이다.
우리의 시간은 호흡과 호흡을 즐기는 것에만 바쳐져 있다.
가볍고 자유로우며 편안한 느낌이 든다.
지금 이 순간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저 호흡 수련을 즐길 뿐이다. 느긋함이라는 느낌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이루는 일곱 가지 요소 중 하나이다.

'고요하고, 느긋하게'의 단계를 지나면
'미소 짓고, 내려놓는다'로 넘어간다.
숨을 들이쉴 때 큰 기쁨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미소는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을 느끼지 않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호흡을 수련해왔기 때문에 이미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미소를 지으면 기쁨과 평화는 더욱 확고해지고 긴장이 사라진다.
이것은 마치 '입술 요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미소를 짓는다.

숨을 내쉬면서는 '내려놓는다'고 말한다.
이런 저런 계획이나 걱정을 내려놓고 그냥
나 자신이 되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음식을 내놓으며


                  이 음식 속에
                  뚜렷이 보인다
                  내 생명 떠받치는
                  온 우주의 존재가





이 게송을 읊으면 
우리의 삶과 살아 있는 모든 종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듯, 
모든 것이 상호의존하면서 함께 발생한다는 원칙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먹는 일은 아주 심오한 수행이다. 
손수 밥을 지어 먹을 때든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을 먹을 때든 
음식을 바라보면서는 언제나 미소를 지어라.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 : 틱낫한 지음 오다 마유미 그림 이창희 번역 마음터 출판]


             [한글 번역서 안내 : 예스24]



           [영어 원서 안내 : amazon.com]




2013년 12월 3일 화요일

[Image] The Noble Eightfold Path


Mindfulness and The Noble Eightfold Path






[畵] 八正道 : 念定慧


八 正 道 : 念 定 慧






[펌] 붓다의 길 - 틱낫한 스님 (2)


붓다의 길 [The Buddha's Way]

- 틱낫한 스님(플럼빌리지 수련회 법회)

한글 번역 자료 출처 : BTN(권선아 번역)  바로가기▷






바른 견해라는 것은 지혜, Prajna, 깊은 이해입니다. 

그것은 수행과 명상의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집중을 수행한다면 통찰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통찰, 그 깊은 이해, 그 지식, 그 지혜가 바로 정견(正見)입니다. 
우리는 정견(正見)이 모든 견해가 사라진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반야심경이 필요합니다.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정견(正見)이라는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플럼빌리지에서는 바른 생각이란 
자비, 이해와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만일 당신이 일으킨 생각에 자비와 이해가 없다면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이해, 바른 견해(正見)는 다른 모든 행위의 기초가 됩니다.

당신이 생각을 하든, 말을 하든, 행위를 하든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바른 것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바른 견해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가 기초이며 전 세계적인 도덕 체계를 위해서 
불교 전통의 정수인 정견(正見), 바른 이해를 제시해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태어남도 죽음도 없고, 생성도 파괴도 없고, 증가도 감소도 없다.’ 
그리고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로 계속 이어집니다. 
고통도 행복도 없고, 이로움도 해로움도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공부하면 선/악은 우리 마음의 반영이며 
객관적인 실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존재/비존재의 쌍과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합니다. 
존재와 비존재는 우리 마음 속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의식은 내면에 있고 세상과 현실은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성에 대한 가르침, 연기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진정 바른 이해, 정견(正見)에 도달하기 위해 그와 같은 가르침을 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견(正見)을 갖게 되면 모든 것이 진정으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곧 지구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보살피는 것은 지구를 보살피는 것입니다.

수행자로서 우리가 세상과 부처님께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통찰입니다.

통찰은 우리를 해탈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 통찰은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집중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깊은 집중 속에서 사는 것은 
지속적으로 통찰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해탈, 
우리 자신의 치유, 우리 자신의 자양을 위한 것이며 
세상의 해탈, 세상의 치유, 세상의 자양을 위한 것입니다.





바른 이해란 정견(正見), 
Samyag-drsti는 모든 견해를 초월합니다. 

모든 견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도구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연기(緣起)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견해, 정견(正見)이란 
무상, 무아, 연기를 포함한 모든 견해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야심경의 핵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손가락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의도는 당신의 손가락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달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을 달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길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손가락을 아주 지혜롭게 써야 합니다. 

불법을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방편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통찰과 견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침은 견해로서 제시된 것입니다.

(성냥에 불을 붙이며) 
이것은 당신에게 성냥을 주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불꽃을 주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성냥개비를 적절히 잘 써서 성냥이 불꽃을 일으키게 해야 합니다. 
불꽃이 나타나면 이 성냥개비는 끝에 달린 성냥을 태웁니다. 

통찰이 일어나면 그것은 견해를 소멸하고 더 이상 어떤 견해도 남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거기에는 통찰만 있고 견해는 사라졌습니다. 
당신을 해탈하게 하는 것은 통찰이지 견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은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각을 잘못 하면 세상이 파괴되고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생각(正思惟)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른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분별하지 않고, 연기, 이해, 용서, 자비와 궤를 같이하는 생각은 
당신 자신, 당신의 건강, 당신의 마음, 그리고 세상에 즉각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바른 생각은 당신을 치유하고 세상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좋은 수행자는 매 순간 바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바른 견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바른 견해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바른 견해는 불이와 연기, 분별하지 않음의 통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생각의 예술을 배워야 합니다. 

말도 역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비, 이해, 분별하지 않음, 
포용과 궤를 같이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바른 말에는 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친절, 용서, 자비가 깃든 말을 하고 나면 훨씬 기분이 좋아집니다. 

바른 말은 당신을 치유할 수 있고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치유하고 당신을 자유롭게 하고 다른 사람과 세상의 치유를 돕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종류의 행위입니다.

세 번째 종류의 행위는 몸으로 하는 행위입니다. 
당신이 구하고, 뒷받침하고,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면 
당신 마음은 아주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즉각 맛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 가지 종류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신(身), 구(口), 의(意)로 짓는 행위이며 
그와 같은 행위를 업(業) 즉, 카르마(karma)라고 합니다.

업의 원인이 있으면 업의 열매, 즉 업의 과보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의 업을 짓습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에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생각의 영향, 말의 영향, 행위의 영향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살아 있든 사라졌든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행위는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업은 계속됩니다. 
에너지로서의 업, 원인과 결과로서의 업은 계속됩니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일으킬 때 
당신이 일으킨 그 생각에는 당신의 서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 생각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이지요. 
당신은 그 생각에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자비, 용서, 분별하지 않음의 생각이라면 당신은 아름답게 계속될 것입니다.

바른 생각은 두려움이나 분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연기의 통찰, 무아의 통찰, 불이의 통찰이 있으면 
생각과 말과 행위가 바를 수 있습니다.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위에는 
우리의 서명이 남아 있고 우리의 업과 함께 계속될 것입니다.






(한글 번역 자료 출처 : BTN(권선아 번역) 바로가기▷)

(참고 : 틱낫한 스님의 Mindfulness를 마음 챙김으로 번역한 것을 전념(...)으로 수정하였음)




[펌] 붓다의 길 - 틱낫한 스님


붓다의 길 [The Buddha's Way]

- 틱낫한 스님(플럼빌리지 수련회 법회)


한글 번역 자료 출처 : BTN(권선아 번역)  바로가기▷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집중의 에너지는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접촉할 때
당신은 삶의 온갖 경이로움에 접촉합니다.
당신은 불국정토와 신의 왕국이 지금 여기에 열려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교수행자를 위해서라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정토를 찾고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찾으십시오.
지금이 아니라면 정토는 결코 없습니다.
기독교인 친구들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의 왕국을 찾고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신의 왕국은 지금이 아니라면 결코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는
신의 왕국과 불국정토를 포함한 모든 경이로움에 다가가는 문입니다.
부처님, 예수님, 자유, 행복 역시 현재의 순간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수행은 당신이 지금 이 순간이라는 집으로 돌아가도록 돕습니다.

부처님의 길은 에너지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의 에너지는
수행 중에 이끌어내야하는 에너지입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수행입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
우리가 거기 있도록 지금 이 순간에 서 있도록 돕는 에너지입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은 마음을 몸으로 되돌려놓습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
우리가 진정으로 지금 이 순간에 머물도록,
진정으로 살아있도록, 삶의 경이로움과 접촉하도록 돕습니다.
그 경이로움은 지금 이 순간에 열려 있습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 우리의 고통을 알게 해 줍니다.
왜냐하면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은 우리의 행복과 고통,
세상의 고통을 다루도록 도와주고 세상의 행복을 위해 일하도록 도와줍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의 에너지는 집중의 에너지를 수반합니다.
당신이 무엇에 전념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에 대한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을 지켜 살아있게 한다면
당신은 거기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거기에 집중하면 할수록
당신은 그것에 더욱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하게 됩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를 돕는 에너지입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집중이 충분히 강하면 통찰을 얻게 됩니다.

통찰은 깨달음이며 이해입니다.

우리는 통찰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년 간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통찰은 일상사입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이 있을 때면 언제나 거기 어떤 통찰이 있습니다.

당신이 숨을 들이쉰다고 가정합시다.
당신이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 안에서 숨을 쉰다면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하면서 숨 쉬는 것은 이미 통찰입니다.
모두가 숨을 들이쉬지만 모두가 숨을 들이쉬는 것에 깨어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깨어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통찰입니다.
그것이 이미 깨달음이고 그것이 이미 해탈입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함께 숨을 들이쉬면
당신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닫습니다.
당신이 살아 있지 않다면 당신은 숨을 들이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함께 숨을 들이쉬면
당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언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모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위대한 기적입니다. 당신은 다시금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들이쉬는 숨이 축제가 되는 그런 방식으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당신은 들이쉬는 숨으로 당신이 살아 있음을 축하합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함께
숨을 쉬는 것은 아주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을 가져오고
집중을 가져오고 통찰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통찰이 있으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압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지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면서 이끌어내는 세 가지 에너지는 모든 윤리의 기초가 됩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 - 집중 - 통찰을 말하지 않고서는
도덕을 말할 수 없고 바른 행동을 말할 수 없고 불교적 윤리를 말할 수 없습니다.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 - 집중 - 통찰의 에너지와 함께
당신은 길을 닦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인류를 위해 길을 찾고 길을 닦고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평화에 이르는 길, 행복에 이르는 길, 변화와 치유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의 측면에서 전 세계적인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본적인 수행은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 - 집중 - 통찰의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통찰은 자비, 사랑, 조화, 평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한글 번역 자료 출처 : BTN(권선아 번역) 바로가기▷)

(참고 : 틱낫한 스님의 Mindfulness를 마음 챙김으로 번역한 것을 전념(...)으로 수정하였음)




[영화] 쿵푸 팬더2 "내면의 평화"


쿵푸 팬더2  "내면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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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보 : 예스24]

쿵푸팬더2



[Movie] Kung Fu Panda2 "Inner Peace"


Kung Fu Panda2  "Inner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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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Information : Amazon.com]




2013년 11월 23일 토요일

[펌] "아! 붓다" 『대사십경』맛찌마니까야117


대사십에 관한 말씀(大四十經, Mahacattarisaka Sutta)



이것은 내가 들은 이야기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성 기수습고독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 비구들이여."
그러자 여러 비구들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오, 스승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 거룩한 정정(聖正定)과 그 원인
그리고 그에 따르는 요소들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한다.
내가 말하는 동안 주의를 기울여 잘 듣도록 하라."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러 비구들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정정을 꾸미는 원인과 그에 따르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근과 정념이다.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것(心一境性)에 앞의 일곱 가지 요소가 따를 때,
그것을 그 원인과 그에 따르는 요소들로 꾸며진 거룩한 정정이라고 한다.


앞서 한 말을 보면, 정견이 처음에 나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나오는가? 잘못된 견해가 있을 때 
그것이 잘못된 견해라는 것을 알면 그것은 이미 정견이다. 정견이 있을 때
그것이 정견이라는 것을 알면 그것 역시 정견이다. 잘못된 견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시와 공양이나 희생에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보는 견해다.
그것은 건전하거나 건전하지 못한 행동의 과보가 없다고 하는 견해다.
그것은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고 저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존재도 없고, 스스로 생겨나는 존재도 없다고 하는 견해다.
그것은 도를 이루었거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더나
스스로 특별한 깨달음을 경험했거나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밝게 해줄 수 있는 비구나 바라문은 없다고 하는 견해다.

비구들이여, 
정견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두 종류의 정견이 있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有漏) 정견이 있다.
그것은 공덕을 낳기는 하지만 여전히 집착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춘(無漏) 고귀한 정견이 있다.
그것은 세속을 초월한 것으로 팔정도의 한 요소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는 정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시와 공양과 희생에 효과가 있다는 견해다.
그것은 건전하고 건전하지 못한 행동의 과보가 있다는 견해다.
그것은 이 세상도 존재하고 저 세상도 존재한다고 하는 견해다.
그것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존재도 있고 스스로 생겨나는 존재도 있다고 하는 견해다.
도를 이루었거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거나
스스로 특별한 깨달음을 경험했거나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밝게 해줄 수 있는 비구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는 견해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춘 정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마음이 고귀하고 새는 법이 없으며 팔정도를 갖추고
팔정도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지혜, 
즉 오근(五根)의 하나로서의 지혜와 오력(五力)의 하나로서의 지혜
그리고 택법각지(擇法覺支)로서의 지혜를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이 고귀하고 새는 일이 없고 세속을 초월하고 팔정도의 하나인 것이다.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정견을 취하고자 노력하는 이는 정근을 한다.
전념을 통해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정견에 머무는 이는 정념을 얻는다.
이 세 가지 현상은 정견의 주위를 맴돈다. 그것들은 정견, 정근과 정념이다.


앞서 한 말을 보면 정견이 처음에 나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나오는가?
잘못된 생각이 있을 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인 줄 알면 그것은 이미 정견이다.
정사가 있을 때 그것이 정사인 줄 알면 그것 역시 정견이다.
잘못된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 증오와 위해로 통하는 생각이다.

정사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두 종류의 정사가 있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정사가 있다.
그것은 공덕을 낳지만 여전히 집착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다음으로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춘 고귀한 정사가 있다. 
그것은 세속을 초월한 것으로 팔정도의 한 요소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정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 증오와 위해를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고 공덕을 낳지만 여전히 집착에 떨어지고 마는 정사다.

고귀하고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고 
세속을 초월하고 팔정도의 한 요소인 정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마음이 고귀하고 새는 법이 없으며 팔정도를 갖추고
팔정도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사택(思擇), 심구(心求),
사유(思惟), 전주(專注), 전정(專精)과 어행(語行)을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이 고귀하고 새는 법이 없고 세속을 초월하고 팔정도의 하나인 정사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정사를 취하고자 노력하는 이는 정근을 한다.
전념을 통해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정사에 머무는 이는 정념을 얻는다.
이 세 가지 현상은 정사의 주위를 맴돈다. 그것들은 정견, 정근과 정념이다.


앞서 한 말을 보면 정견이 처음에 나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나오는가?
잘못된 말을 할 때 그것이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알면 그것은 이미 정견이다.
정어를 할 때 그것이 정어인 줄 알면, 그것 역시 정견이다. 
잘못된 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말, 비방, 거슬리는 말과 경솔한 말이다.

정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두 종류의 정어가 있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정어가 있다.
다음으로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춘 고귀한 정어가 있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정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말, 비방, 거슬리는 말과 경솔한 말을 자제하는 것이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춘 정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마음이 고귀하고 새는 법이 없으며 팔정도를 갖추고
팔정도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네 종류의 잘못된 말을
삼가고, 그만두고, 참고, 자제하는 것이다.


앞서 한 말을 보면 정견이 처음에 나온다.  정견이 처음에 나오는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그것이 잘못된 행동인 줄 알면 그것은 이미 정견이다.
정업을 행할 때 그것이 정업인 줄 알면 그것 역시 정견이다.
잘못된 행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생, 투도와 사음이다.

정업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두 종류의 정업이 있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정업이 있다.
다음으로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춘 고귀한 정업이 있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정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생, 투도와 사음을 자제하는 것이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춘 정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마음이 고귀하고 새는 법이 없으며 팔정도를 갖추고
팔정도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잘못된 몸으로 하는
행동을 삼가고, 그만두고, 참고, 자제하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그만두고 정업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이는 정근을 한다.
전념을 통해 잘못된 행동을 그만두고 언제나 정업을 행하는 이는 정념을 얻는다.
이 세 가지 현상은 정업의 주위를 맴돈다. 그것들은 정견, 정근과 정념이다.


앞서 한 말을 보면 정견이 처음에 나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나오는가?
잘못된 생계를 보고 그것이 잘못된 생계인 줄 알면 그것은 이미 정견이다.
정명을 보고 그것이 정명인 줄 알면 그것 역시 정견이다.
잘못된 생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선적이고 분명하지 않은 말을 늘어놓고,
점을 봐주며, 사기치고 욕심을 부리고 이자놀이를 하는 것이다.

정명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두 종류의 정명이 있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정명이 있다.
다음으로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춘 고귀한 정명이 있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정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귀한 제자가 잘못된 생계를 그만두고 정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새는 것이 완전히 멈춘 정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마음이 고귀하고 새는 법이 없으며 팔정도를 갖추고
팔정도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잘못된 생계를
삼가고, 그만두고, 참고, 자제하는 것이다.

잘못된 생계를 그만두고 정명을 취하려고 노력하는 이는 정근을 한다.
전념을 통해 잘못된 생계를 그만두고 정명에 머무는 이는 정념을 얻는다.
이 세 가지 현상은 정명의 주위를 맴돈다. 그것들은 정견, 정근과 정념이다.


앞서 한 말을 보면 정견이 처음에 나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나오는가?
정사는 정견을 가진 사람에게서 생긴다.
정어는 정사를 하는 사람에게서 생긴다.
정업은 정어를 하는 사람에게서 생긴다.
정명은 정업을 하는 사람에게서 생긴다.
정근은 정명을 하는 사람에게서 생긴다.
정정은 정념을 하는 사람에게서 생긴다.
정각(正覺)은 정정을 하는 사람에게서 생긴다.
정해탈(定解脫)은 정정를 가진 사람에게서 생긴다.
그리고 정해탈은 정지(正智)를 가진 사람에게서 생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배우는 과정 중에 있는 수행자들은 여덟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고,
아라한인 수행자는 열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앞서 한 말을 보면 정견이 처음에 나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나오는가? 정견을 가진 이는 잘못된 견해를 극복한다.
잘못된 견해에 기인하는 그밖에 다른 모든 불건전하고 잘못된 상태 역시 극복한다.
그리고 정견에 기인하는 모든 건전한 상태를 성취하고자 수행한다.

정사 등등을 하는 이는 잘못된 생각을 극복한다.
정어 등등을 하는 이는 잘못된 말을 극복한다.
정업 등등을 하는 이는 잘못된 행동을 극복한다.
정명 등등을 하는 이는 잘못된 생계를 극복한다.
정근 등등을 하는 이는 잘못된 노력을 극복한다.
정념 등등을 하는 이는 잘못된 전념을 극복한다.
정정 등등을 하는 이는 잘못된 집중을 극복한다.
정지 등등을 하는 이는 잘못된 지혜를 극복한다.
정해탈 등등을 하는 이는 잘못된 해탈을 극복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건전한 것을 받쳐주는 스무 가지 요소가 있고
불건전한 것을 받쳐주는 스무 가지 요소가 있다.
대사십에 관한 설법이 이제 막 구르기 시작했으니
비구, 바라문, 신, 마라, 브라흐마 
또는 이 세상의 그 누구라 해도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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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틱낫한 지음 | 진현종 옮김 | 반디미디어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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